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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5 ::: Passion 18

::: Passion

2010. 1. 25. 11:09 from ♬ + voyage


언젠가 미국의 한 작가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 미국 문학이 왜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소설가들 거의 대부분이 쾌적한 대학촌에 살고 있거든요(그들은 대부분 교수입니다).

거기엔 자동차 공장도, 매연도, 흑백갈등도, 마약갱도, 아동학대도 없지요.

그러니 그들 작품 속의 일상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것에 공감하는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그 책을 사보구요.

그렇게 굴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흑인이나 제3세계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주목받는 거지요.

그 작품 속에는 미국 문학에선 사라진 활력이 있으니까요.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의 눈으로 보게 되고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가리봉 오거리를 걸어다니면 가리봉 오거리의 눈으로 보게 되고

롯데백화점을 왔다갔다하면 백화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알고 보면 무척 단순합니다.


나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소설가들이 지식인 혹은 부르주아의 불륜이나 방황,

그리고 과거향수, 혹은 텍스트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

임상수 같은 영화작가들이 가리봉 오거리에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솔직히 말하면 부러운 일입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종교는 공인되기 직전에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고

장르는 예술로 인정받기 직전에 가장 불타오른다고.

그러니까 일단 예술이라고 인정받고 나면 활력은 떨어진다는 것인데(아카데미즘의 폐해랄까요?),

그런 면에서는 대학에 이렇게 영화관련 학과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나쁜일일까요(참고로 현재 남한에는 80여개 대학에 문예창작학과가 있습니다).


여하튼, 한국영화가 '작품을 위해서라면 어디에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열정적인 창작자, 혹은 창작예비군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잘되는 동네라서 그런 건지, 그래서 잘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김영하 ☆ 이우일의 영화이야기' 중에서